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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0. 10世 〉12. <요재공>영도재중건기(永陶齋重建記)휘찬(諱纘)
1. 문헌 목록 〉10. 10世 〉14. <부정공>통훈대부태인현감공휘대승묘갈명(通訓大夫泰仁縣監公諱大承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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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요재공>순창조씨세거비(淳昌趙氏世居碑)
순창조씨세거비(淳昌趙氏世居碑) 寶城은 淳昌趙氏 玄洲公派의 本鄉이다. 寶城에 世居한 淳昌趙氏는 高麗 中葉 檢校大將軍 守門下侍中 諱 璋을 始祖로 門下侍中 玉川府院君 忠獻公 諱 元吉을 遠祖로 한 麗末 杜門洞 賢人 樂齊公 諱 瑛의 玄孫 朝鮮 成宗末 通訓大夫 比安縣監 玄洲公 諱 彭孫의 後裔이다. 趙氏의 入寶城은 燕山朝 甲子 士禍時 避禍로 玄洲公 諱 彭孫의 季子 世系 十世 通訓大夫 谷城縣監 陶庵公 諱 纘께서 季子 顯陵參奉 諱 由信과 함께 南原 朱村坊(現 朱川面)에서 寶城 城北 杜門洞에 隱居하심에 비롯되었다. 緣由는 燕山君이 王位를 이어받자 자기 어머니인 成宗妃 尹氏를 廢黜하고 死藥을 내려 自決하게 할 때 그 論議에 참여한 成宗朝의 承旨 등 臣下를 甲子(一五○四)年에 處刑하였는 바 陶菴公 諱 纘의 祖父 諱 時平께서 成宗朝에 司諫院 正言을 諱 時平의 舍弟 諱 時若께서 承政院 左承旨를 諱 時平의 從弟 諱 傳께서 司憲府 持平을 行하셔 被禍가 두려워 諱 纘의 同壻 珍原人 進士 朴興原 女壻 寶城人 宣遇贇 僉使 宣世雄이 있고 諱 由信의 妻父 礪山人 縣監 宋仲儒가 가까이 사는 寶城으로 移居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寶城 杜門洞은 陶菴公 諱 纘의 隱居로 일컬어진 洞名일 것이고 一名 北趙洞은 城北趙氏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無道한 폭군 연산이 中宗反正(一五○六)으로 退位되고 家門이 中興하니 玄洲公 諱 彭孫의 三從 諱 九齡이 中宗 十一年에 登文科하고 内從姪 新平人 宋純이 中宗 十四年 登文科하고 宗族 諱 義貞이 中宗의 駙馬로 淳原尉이고 入寶城 二世 清庵公 諱 之漢은 中宗 二十二年 登武科하여 通訓大夫 行 海南縣監하셨다. 淸庵公께서 祖諱 纘과 考諱 由信의 墓宅을 蘆洞面 甘井里에 모심으로서 보성에 玄洲公派의 本鄉으로 定着한 것이다. 入寶城 趙宗의 系圖를 略述하면 世系十二世 諱 之漢의 長子 諱 瓘은 明宗 九年에 登武科하여 忠毅校尉判正을 거쳐 兵曹佐郎을 하신 贈 兵曹參判이요 次子 諱 琪는 蔭으로 宣祖朝 軍資監僉正을 하셨고 諱 瓘의 長子 諱 廷義는 宣祖一年 登武科하여 進勇校尉義 興衛 部將하시고 壬辰倭亂에 倡義하여 보성군수 安弘國의 副將으로 湖嶺間 戰鬪에 많은 戰功을 세우고 丁酉再亂때 南原城 戰鬪時 雲峰에서 殉國한 忠烈이요 次子 諱 廷美는 贈户曹參議 行同知中樞府事요 蘆洞 入鄉祖이며 三子 諱 廷式은 登武科로 禦侮將軍 訓練判官하셨는데 無後하다. 諱 琪의 長子 諱 廷喆은 早沒하고 次子 諱 廷元은 光海朝에 登武科하여 梁山郡守를 行하고 三子 諱 廷亨은 仁祖朝 丙子胡亂에 倡義 義旅하였다. 특히 丙子胡亂시 보성의 牛山 安邦俊 先生을 義兵將으로 數百의 列邑儒生이 倡義하여 勤王義旋할 때에 趙門에서 七義士가 赴義함에 安公이 一門七義는 類例없는 일이라 大讚하여 마지 않았는 바 곧 七義士는 世系 十四世 諱 廷亨 察訪 諱 廷顯 兄弟와 十五世 同知 中樞府事 諱弘國 諱昌國 兄弟와 諱興國 十六世 諱舜弼 諱 舜立 兄弟이다. 壬辰亂에 殉國하신 義兵將 諱廷義와 丙子胡亂에 倡義한 七義士의 義跡은 湖南節義錄에 상세히 밝혀져 있으며 忠烈 忠義 八義士의 位牌는 湖南 彰義館에 配享되었다. 以後의 代는 每擧함을 略하나 先訓을 承襲하여 忠義와 儒道로 宗統을 이어 오늘날 入寶城 十七代에 이르고 孝禮德義로 子孫과 鄉里를 敎化해 온지 四百八十餘年으로 派祖 玄洲公 諱彭孫의 壇을 蘆洞面 甘井里 先塋에 모시어 玉川趙氏 寶城宗派의 都先塋으로 秋享奉祀하고 있다. 玉川趙氏는 高麗朝 節臣 家門으로 李氏王朝에 不服하여 後孫이 크게 登用되지 못하였고 世와 歲를 이어오면서 士禍와 黨爭과 戰禍로 宗勢의 盛衰가 있었으니 林泉에 살으신 先代의 遺事를 어찌 다 헤아리랴. 世를 이어오면서 玄洲公後 世系 十四世에서 四個의 支派로 分系하니 壬辰亂 義兵將 諱 廷義後를 部將公派로, 贈户曹參議 行同知中樞府事 諱廷美後를 參議公派로 丙子義士 梁山郡守 諱廷元後를 梁山公派로 丙子義士 桃源道察訪 諱廷顯 後를 察訪公派라 한다. 孫이 繁昌하여 寶城에는 蘆洞 彌力 文德에 世居하고 長興 康津 羅州 昇州 潭陽 南原 等地에서 集姓村을 이루었으며 오늘날에는 서울 釜山 光州 等 都市에 移居한 宗人이 많아 지역별 宗會를 갖고 있다. 지금은 階級과 身分의 班列이 없어지고 傳統과 慣行이 變改되어 遺風을 承襲키 어려운 時代에 살고 있으나 血統과 家系는 千世萬代로 변함없을 것이니 後孫들의 崇祖爲先과 宗族의 敦睦은 宗人의 道理일 것이다. 여기 世居碑를 세움은 世人에 本宗의 五百年 世居鄉임을 알림과 아울러 宗族이 京鄉에 散居하고 外國에 移住함에 集姓村의 遺制가 喪失되어가 入鄉祖의 時事와 後系를 標石으로 남기어 後孫에게 傳하고자 함이다. 檀紀四三二六年(西紀一九九三年) 癸酉陰十月 日 四月革命義士 陶庵公十六代孫 啓賢 記 十五代孫 得升 書 淳昌趙氏玄洲公派宗會長 化翼外僉宗一同 竪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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